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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문화예술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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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운림산방Jindo Art Center

국가지정 명승 제80호/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관광지 100선

ㆍ주소 : 전남 진도군 의신면 운림산방로 315
ㆍ전화 : 1588-9601 / 061-540-6286
ㆍ관리 : 진도군 시설관리사업소

전통남화의 성지, 운림산방

첨찰산 첩첩산중에 아침저녁으로 피어오르는 안개가 구름숲을 이룬다는 운림산방. 산방 마루에 걸터 앉아 운림지를 내려다본다. 슬며시 내리는 보슬비에 초가지붕이 젖고 이윽고 뜨락에는 산빛 물이 든다. 때 마침 피오르던 안개는 나갈 길이 없는지 운림지 가운데 배롱나무 가지에 걸려 있고 어느새 몽환의 세계에 갇힌다. 운림산방은 조선시대 남화의 대가였던 소치 허련 선생(1808~1893)이 말년에 거처하며 여생을 보 냈던 화실이다. 이곳에는 연못과 정원이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며 초가집과 소치기념관, 진도역사관 등이 있다. 영화 “스캔들 조선남여상열지사”의 배경이 되기도 하여 더욱 유명하다. 이곳에서 소치(小痴)는 미산(米山) 허형을 낳았고 미산이 이곳에서 그림을 그렸으며 의재 허백련이 미산에게 처음으로 그림을 익힌 곳이기도 하다. 이와같이 유서깊은 운림산방은 소치(小痴) - 미산(米山) - 남농(南農) - 임전(林田) 등 5대에 걸쳐 전통 남화를 이어준 한국 남화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운림산방, 쌍계사, 상록수림이 한데 어우러진 이곳을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으며, 운림산방에서 약 150m를 오르면 1995년 8월 15일에 세워진 진도아리랑비가 아담하게 서있다. 운림산방 앞에 있는 연못은 한면이 35m 가량되며, 그 중심에는 자연석으로 쌓아 만든 둥근 섬이 있고 여기에는 소치가 심었다는 백일홍 한 그루가 있다.

- 지정일 : 2011. 8. 8.
- 지정번호 : 국가지정명승 제80호
- 규모 : 경내일원

소치 허련 소개 : 소치(小痴) 허유 (許維) 1808~1893

  • 본관 양천(陽川). 자 마힐(摩詰), 호 소치(小癡) ·노치(老癡). 전남 진도(珍島) 출생.
    서화를 김정희(金正喜)에게 사사하고 벼슬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글 ·그림 ·글씨를 모두 잘하여 삼절(三絶)로 불렸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묵죽(墨竹)을 잘 그렸다. 글씨는 김정희의 글씨를 따라 화제에 흔히 추사체(秋史體)를 썼다.

    작품으로 《하경산수도(夏景山水圖)》 《추강만교도(秋江晩橋圖)》 《만산묘옥도(晩山택屋圖)》 《산교청망도(山橋淸望圖)》 《동파입리도(東坡笠履圖)》 《산수병풍(山水屛風)》 《산수도》 《노송도병풍(老松圖屛風)》 《묵해도(墨海圖)》 《괴석도쌍폭(怪石圖雙幅)》 《포도도(葡萄圖)》 등이 있다.
    소치(小癡) 허유(1809-1892)는 처음 이름은 허련 (許鍊)이었으나, 후에 중국 남종 문인화의 대가 왕유(王維)의 이름을 따서 허유 라고 개명하였다.
    스승인 김정희로부터 "압록강 동쪽에 그를 따를 자가 없다. 나보다 낫다"는 칭찬을 듣기도 하였다. 만년에는 고향인 진도로 돌아가 운림산방(雲林山房)을 마련하고 작품 제작에 몰두하였다.

    그는 산수화 외에도 모란, 사군자, 연꽃, 괴석, 노송, 파초 등 다양한 소재를 능숙한 필치로 구사하였다. 그의 화풍은 아들인 미산(米山) 허형과 손자인 남농(南農) 허건(許建), 그리고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등으로 이어져 지금까지도 호남 화단의 중요한 맥을 이루고 있다.
소치 3대

양천 허씨의 화맥 1대는 물론 ‘호남 남종화의 시조’로 불리는 소치(小痴) 허련(許鍊:1808~1893)이다. 소치는 1808년 전남 진도에서 태를 묻었다. 조선조 때의 진도는 제주도와 함께 유배지로 유명했다. 허련의 증조부(허대)는 광해군의 형인 임해군의 처조카였다. 광해군이 권좌에 오른 뒤 임해군은 역모에 몰렸다. 이때 허대는 임해군을 수행하기 위해 앞서 진도로 내려갔다가 진도에서 눌러앉았다. 허대의 장남 득생은 용(茸), 순(珣), 방(芳) 세 아들을 두었는데 순의 후손이 허련이고, 방의 후손이 허백련이다. 허련은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는 데 재능이 있었다. 어느 집에 좋은 화첩이 있다는 소문이 나면 거리를 불문하고 찾아가 베껴 그리곤 했다. 스물일곱 살 되던 1835년 고산 윤선도의 고택인 해남 녹우당에 좋은 서화첩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그림을 그렸다. 녹우당은 ‘어부사시사’를 쓴 윤선도의 집이자 다산 정약용의 외가이기도 한, 호남의 학문과 예술을 낳은 요람이었다. 허련이 화가로 대성하게 된 것은 추사 김정희를 만나면서부터. 녹우당을 출입하면서 초의선사를 알게 되었고 초의선사를 통해 추사를 만나게 된다. 허련은 한양으로 가 추사의 집에서 1년간 머문다. 소치라는 호는 추사가 내려주었다.

▲ 생전의 남농 허건. 1839년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를 가자 허련은 김정희를 만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넌다. 당시 제주도를 가는 뱃길은 그야말로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제주도에서 김정희에게 본격적인 그림 수업을 받게 된다. 김정희가 훗날 “압록강 동쪽에 소치를 따를 자가 없다”며 허련의 문기(文氣)를 극찬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허련은 1846년 한양으로 올라가 이재 권돈인의 집에 머물며 헌종에게 자신의 그림을 헌정한다. 1848년 고부감시와 친림회시에 합격했고, 1849년 헌종이 보는 앞에서 왕의 벼루에 먹을 찍어 그림을 그리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이후 허련은 헌종의 후원 속에 한양에 머물며 작품활동과 함께 왕실 소장의 고서화에 대한 품평을 하게 된다. 허련은 1857년 10년여의 타향 생활을 끝내고 고향에 돌아와 운림산방을 세운다. 소치는 1866년 다시 상경해 대원군, 민승호, 민영익 등과 교유하며 서화 품평과 작품 활동을 병행한다. 1887년 정삼품 통정대부를 거쳐 지중추부사를 지낸다. 허련은 1893년 운림산방에서 영면한다. 운림산방의 2대는 소치의 넷째 아들 미산 허형(許瀅:1862~1938)이 뒤를 이었다. 허형은 2남3녀를 두었는데 두 아들 남농 허건(許楗:1908~1987)과 임인 허림(許林:1917~1942)이 화맥을 이어받았다. 3대까지 내려온 것이다. 남농은 보통학교 5학년 때 전국 초급학교 서화작품전에 출품한 풍경화가 입상하면서 그림에 재능을 보였다. 다음 해 남농은 또다시 서화전에 입상하게 된다. 남농의 나이 열아홉. 남농은 “화가의 길을 가겠다”고 결심했으나 부친 허형은 아들의 재능에 마음속으론 기뻐하면서도 화가가 되겠다는 아들을 극구 말렸다. 화가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농 역시 가난을 피할 수가 없었다. 남농은 무리한 작품 활동으로 왼쪽 다리에 피가 통하지 않는 괴질에 걸려 1947년 서른아홉 살에 다리를 절단하게 된다. 남농은 이때의 심경을 “그때 마음을 쏟아 그림을 그리는 생활이 나에게 없었으면 아마 자살하고 말았을 것”이라고 회고한 적이 있다. 허림 역시 일찍부터 재능을 보였다. 허림은 1941년, 1942년 일본 문전에 연속으로 입선했다. 조선인 화가로 일본 문전에 연속 입선한 사람은 허림과 김은호뿐이었다. 그러나 허림은 스물여섯 나이로 요절해 자신의 그림 세계를 미처 꽃피우지 못했다. 허림은 아들 하나를 세상에 남겨놓았는데, 그가 임전 허문(許文:1941~현재)이다. 허문은 일곱 살 때부터 백부 남농의 슬하에서 그림을 익히면서 운림산방의 4대를 이었다. 허문은 가문에 내려오는 갈필법에 자기 특유의 안목을 접합시켜 ‘운문산수화’라는 독자적인 화풍을 정립한 것으로 평가 받는다. 남농의 아들 허경(:1933~)은 현재 남농미술문화재단 이사장으로 있다. 허경은 서울대 법대를 나와 은행원의 길을 갔다. 허경의 아들인 허진(1962~현재) 교수가 다시 5대를 이어받았다. 허 교수와 같은 항렬인 허은, 허청규, 허재 등이 화가의 길을 걷고 있다. 허 교수는 2001년 문화관광부에서 수여하는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수상했다. 이쯤 되면 독자들은 화가의 길을 어떻게 5대째 이어올 수 있는지 의문을 가질 것이다. 비밀은 엄격한 대물림에 있었다. ‘500년 명문가의 자녀교육’의 저자 최효찬씨는 ‘양천 허씨 소치 허련 가문’편에서 그 비결에 대해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부모는 아이가 자신이 정한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면 결코 재능을 인정하지 않았다. 더욱이 아이가 그림에 재능이 있어도 학문을 소홀히 하면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후계자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 작품 '유목동물+인간 2006-8' 앞에 선 허진씨. 화맥 5대의 주인공인 허진 교수는 운림산방의 후계자 조건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시(詩)·서(書)·화(畵)의 어느 한 가지가 아니라 세 가지에 고루 바탕을 두고 있어야 한다. 특히 글공부를 게을리하면 안 되는데, 소치 할아버지가 4남인 미산의 한계를 읽은 것도 바로 글공부를 싫어했던 그의 성격 때문이었다. 문기(文氣)는 붓 재주 하나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허진 교수는 화필을 늦게 잡은 편이다. 할아버지나 아버지, 가족 누구도 그에게 그림을 강요한 적은 없었다. 미술학원 같은 데는 가본 적도 없다. 그러나 피는 못 속이는 것인가? 고등학교 1학년생 허진은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려 미술대학에 진학하기로 결심했고 이때부터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허 교수의 말이다.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목포에 내려가 할아버지 밑에서 사군자를 치며 처음으로 묵향을 접했다. 남농 할아버지는 무척 무뚝뚝한 분이어서 손자가 그림을 그려도 잘 그렸는지, 못 그렸는지 별 반응이 없었다. 할아버지가 아무 말 없이 난을 하나 쳐주면 일주일이건 열흘이건 잘 그릴 때까지 그것만 그려야 했다. 할아버지는 ‘먹을 항상 입에 달고 다녀야 하다’고 말했다. 부지런하지 않으면 화가로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작업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렇다 저렇다 전혀 간섭하지 않았다.” 허 교수는 어려서부터 집안 내력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왜 부친(허경)이 그림을 그리지 않았는지 못내 궁금했다. 어느 날 부친은 “가난이 싫었기 때문”이라고 아들에게 말했다. 당시만 해도 화가는 ‘환쟁이’라 불리며 빌어먹는 직업이었다. 허경은 화가 할아버지(남농의 부친 허형)의 삶을 알고 있었다. 그 시대의 화가들이 대부분 그랬던 것처럼 허형은 화필을 들고 이집 저집 부잣집 사랑채에 기거하면서 그림이나 병풍을 그려주고 그 대가로 돈이나 양식을 얻어와 호구지책으로 삼았다. 할아버지의 생활을 눈으로 봤기에 허경은 일찍부터 화가의 길을 접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환경이었기에 남농 역시 변변한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목포 상업전수학원 졸업이 학력의 전부였다. 남농은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해야 했고 그의 스승이자 뛰어넘어야 할 대상은 할아버지 허련이었다. 남농은 1982년 버려져 있던 운림산방을 인수해 복원한다. 그 후 운림산방은 지방문화재 51호로 지정되었고, 1987년 운림산방을 진도군에 기부채납한다. 같은 해 11월 5일 남농은 80세를 일기로 운명했다. 허련(1대)-허형(2대)-허건·허림(3대)-허문(4대)-허진(5대). 운림산방의 화맥 5대는 외국 유학과도 거의 인연이 없다. 요절한 허림만이 1940년 일본으로 건너가 1년간 천단화학교에서 공부한 것이 전부다. 허진 교수 역시 외국 유학을 가지 않았고 서울대 미대에서 학부와 대학원을 마쳤다. 남농은 소치의 화풍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 한국 남종화의 큰 봉우리로 우뚝 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허진 교수는 남농의 외모를 많이 닮았다. 허진 교수는 어릴 적 열병을 앓아 청력에 장애가 있고 말을 조금 더듬는다. 허진 교수는 “그림을 시작할 때부터 ‘남농의 손자’ ‘소치의 후손’이라는 얘기를 너무 많이 들어 솔직히 반발이 생겼다”고 말한다. 그는 “일찍부터 운림산방이란 큰 나무를 벗어나야 내가 존재할 수 있다”고 결심했다. 허진 교수는 한국화를 그리지만 그의 그림에서 산수(山水)를 찾아보긴 힘들다. 오히려 강한 사회 비판과 고발을 읽을 수 있다. 그는 전통 수묵화의 기법을 섭렵했으면서도 남농의 화풍을 모방하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18년을 보냈다. 그는 “그러나 40대 중반이 되니까 자연을 주제로 한 전통의 가치에 대해 다시 사색하게 된다”고 말했다.



남종문인화란?

  • 1. 중국 명나라 문인 서화가에 의해 시작 됨 - 남, 북종화파로 나뉨
    1) 수묵산수화 - 남종화
    2) 착색산수화 - 북종화
    * 그 시조인 왕유(남종화), 이사훈, 이소도(북종화) ​


    2. 우리나라의 남종화
    1) 17세기부터 청나라에서부터 유입됨
    2) 18세기
    - 강세황, 이인상, 심사정 등의 문인화가
    - 김홍도, 이인문 등 화원화가에게서 남종문인화풍이 보이기 시작함 ​

    3) 19세기(이때부터 본격적인 남종화 전개됨)
    - 추사 김정희를 중심 으로 남종화가 전개됨.
    - 추사 김정희의 문화생이던 ‘소치 허련 ’이 당시 화단을 풍미함
    (추사 김정희 “압록강 동쪽에 소치를 따를만한 화가 없다”, “소치 그림이 나보다 낫다.”등 엄청난 칭찬을 들으셨다고….)

    4) 허련이 1856년에 진도로 낙향하여 화실 운림산방을 마련 해 작품활동
    - 허련의 아들 미산 허형, 손자인 남농허건, 방손인 의재 허백련 으로 계승되며 호남화단의 특징인 남종문인화가 확립


    3. 현대 남종화 - 진도는 한국 남종화의 뿌리
    - 금봉 박행보, 치련 허의득, 정전 박항환, 등 수많은 화가들이 활동했음.
    - 회화 뿐만 아니라 서예의 ‘소전 손재형’이 이름을 날림(전남도립미술관에서 특별전!)
    - 장전 하남호, 성암 한창교, 죽곡 박인혁, 동원 김영수, 소지 서정재 등의 서예가들이 있다.
정의
동양화의 한 분파로 북종화에 대비되는 화파(畵 派).

개설
우리나라에서는 남종화 또는 남종문인화(南 宗 文 人 畵)라는 말로 통용되며, 일본에서는 주로 남화(南 畵, 난가)라고 부른다. 이 용어의 시초는 중국 명나라 말의 서화가 겸 이론가로 널리 알려진 동기창(董 其 昌)과 그의 친구 막시룡(莫 是 龍)이 1610년경에 쓴 것으로 전해지는 「화설(畵 說)」이라는 짧은 글 속에 정리된 중국 산수화의 남·북종 양파의 구분에서 비롯되었다.

연원
동기창과 막시룡은 당대(唐 代) 선불교(禪 佛 敎)의 남·북 분파가 생긴 것처럼 중국 산수화도 당대를 기점으로 화가의 신분, 회화의 이념적·양식적 배경을 토대로 한 구분을 시도하였다. 즉 남종선(南 宗 禪)에서 주장하는 돈오(頓 悟 : 단번에 깨달음)의 개념, 화가의 영감(靈 感), 내적 진리의 추구를 중요시하는 문인 사대부화(士 大 夫 畵)의 이론을 같은 맥락으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점수(漸 修 : 차츰 닦아 깨달음)를 주장하는 북종선(北 宗 禪)과 화법(畵 法)의 단계적 연마를 중요시하는 화공(畵 工)들의 그림 간의 유사점을 발견하여 사대부 또는 문인들의 그림을 남종화로, 화공들의 그림을 북종화로 구분하였다. 그러나 남종선의 창시자인 혜능(慧 能)과 북종선의 창시자인 신수(神 秀)가 각각 광동성 소주(韶 州)와 하북성의 형주(荊 州)에서 활약한 것과 달리 남종화와 북종화로 구분되는 화가들의 출신 지역이 반드시 남북으로 구분되지는 않았다. 「화설」에서 남종화파로 구분한 화가들은 당대 수묵산수화의 시조로 추앙받게 된 왕유(王 維)로부터 시작하여 당나라 말의 장조(張 璪), 오대(五 代)의 곽충서(郭 忠 恕), 동원(董 源), 거연(巨 然), 형호(荊 浩), 관동(關 仝), 송대(宋 代)의 미불(米 芾)과 미우인(米 友 仁) 부자, 원대(元 代)의 사대가(四 大 家)로 불리는 황공망(黃 公 望), 오진(吳 鎭), 예찬(倪 瓚), 왕몽(王 蒙) 등이다. 동기창의 「화안(畵 眼)」에서는 이 계보에 이성(李 成), 범관(范 寬), 이공린(李 公 麟), 왕선(王 詵) 등의 북송화가들과 원의 사대가를 이어받은 명대(明 代)의 오파(吳 派) 화가 심주(沈 周)와 문징명(文 徵 明)이 추가되었다. 그 뒤 심호(沈 顥)가 그의 「화진(畵 塵)」에서 절파(浙 派) 화가들을 북종화파로 분류함으로써 남·북종화는 화가의 사회적 지위와 회화 양식을 모두 고려한 구분이 되었다. 1781년에 발표된 심종건(沈 宗 騫)의 「개주학화편(介 舟 學 畵 篇)」에서는 남종화가들과 북종화가들의 출신 지역이 대부분 남쪽과 북쪽으로 구분되는 것을 지적하였다. 그래서 남·북종파의 가름이 화가들의 출신 지역까지 일치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하였다. 결과적으로 명나라 말 이후에는 중국 산수화의 양대 산맥이 뚜렷하게 구분 지어졌다. 남종화는 위에서 열거한 여러 화가들이 구사했던 수묵산수화(水 墨 山 水 畵)의 복합적 양식으로 이해되고 받아들여졌다. 대표적인 양식적 요소로는 피마준(披 麻 皴), 우점준(雨 點 皴), 미점준(米 點 皴), 절대준(折 帶 皴), 태점(苔 點) 등의 준법(皴 法 : 산이나 바위 표면의 질감을 표현하는 기법)을 들 수 있다. 그 밖에도 독특한 용묵법(用 墨 法) 또는 구도의 전형이 몇 가지씩 조합되면서 소위 남종화의 양식이 성립되었다. 이와 같은 구분은 이미 북송대부터 차츰 생기기 시작했다고 보아야 한다. 북송의 소식(蘇 軾)과 그의 친구들이 사인(士 人)과 화공의 그림은 그들의 신분적·교양적 차이로 인하여 필연적으로 여러 가지 차이가 난다는 논리를 세웠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사인지화(士 人 之 畵)’ 또는 ‘사대부화(士 大 夫 畵)’라는 용어와 사대부 화론(畵 論)을 만들었다. 즉 사대부화란 그림을 업으로 삼지 않는 화가들이 여기(餘 技) 또는 여흥(餘 興)으로 자신들의 의중(意 中)을 표현하기 위해 그린 그림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기법에 얽매이거나 사물의 세부적 묘사에 치중하지 않았다. 단지 그리고자 하는 사물의 진수를 표현할 수 있을 만큼 학문과 교양, 그리고 서도(書 道)로 연마한 필력(筆 力)을 갖춘 상태에서 영감을 받아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었다. 북송대는 사회적으로 문인(文 人)이 곧 사대부라는 등식이 성립해 있던 때였다. 그러나 원대부터는 반드시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아 결국은 ‘사대부화’ 대신에 ‘문인지화(文 人 之 畵)’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동기창의 남북종화론이 성립되었고 이후 남종화와 문인화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생기게 되었다.

변천
우리나라에서는 18세기 전반기에 남종문인화가 본격적으로 수용되고 하나의 양식으로 받아들여진 것으로 파악된다. 하지만 문헌기록을 통해 이미 고려시대에도 사대부들이 원나라를 통하여 북송대 사대부화 이론을 접했음이 확인된다. 그리고 그들의 작품이 현전하지는 않지만, 문인화에서 산수화 다음으로 중요시한 묵죽(墨 竹)과 묵매(墨 梅)를 많이 그렸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조선 초기에는 미가산수(米 家 山 水 : 미불·미우인 부자의 양식을 답습한 산수화)가 수용된 예를 현존 작품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남종화의 양식적 요소가 상당히 일찍부터 수용되었음을 말해준다. 남종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된 조선 후기(약 1700∼1850년)는 한국의 승경(勝 景)을 화폭에 담은 진경산수화(眞 景 山 水 畵)와 주로 서민 계층의 생활을 담은 진솔하고도 해학적인 풍속화(風 俗 畵)가 많이 그려졌던 때였다. 이와 같은 한국의 정서와 자아의식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미술 경향 외에도 이 시기 문화의 다변성에 힘입어 중국 회화의 전통을 반영하는 남종문인화가 꾸준히 확산되어 갔다. 실제로 진경산수화 자체 내에서도 정선(鄭 敾) 이후 모든 화가들이 한국의 산수를 묘사함에 있어 어느 특정 경치 묘사에 알맞은 준법을 창안해 내기도 하였다. 동시에 ‘미가산수’를 위시한 중국 남종화의 준법을 적절하게 배합하여 사용한 것을 볼 수 있다. 17세기 초기부터 조선에 유입되기 시작한 명·청대 각종 화보(畵 譜)의 영향으로 남종화의 전파는 가속화되었다. 그 중에서 우리나라에 비교적 이른 시기에 들어온 것은 고병(顧 炳)의 『고씨역대명공화보(顧 氏 歷 代 名 公 畵 譜)』(약칭 고씨화보, 1603년), 『당시화보(唐 詩 畵 譜)』(萬 曆 年 間), 『십죽재서화보(十 竹 齋 書 畵 譜)』(1627년), 『십죽재전보(十 竹 齋 箋 譜)』(1644년), 그리고 청나라 초 1679년과 1701년, 두 단계에 걸쳐 완간된 『개자원화전(芥 子 園 畵 傳)』 등이다. 『고씨역대명공화보』는 윤두서(尹 斗 緖)가 생전에 사용하던 유물이 남아 있기도 하다. 그리고 정선, 심사정(沈 師 正), 이인상(李 麟 祥) 등 18세기 화가들의 그림에서 중국 화보들의 영향이 많이 확인된다. 그러나 『고씨역대명공화보』의 그림 중에는 중국에서 남종화 계열에 들어가지 않는 화가들의 작품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또한 이 화보가 출간되었을 당시에는 아직 남·북종화의 분파가 형성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화보는 ‘남종문인화의 전파’보다는 좀 더 넓은 의미의 ‘중국 화법의 전파’에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당시화보』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런데 이 화보에는 1606년(선조 39) 조선에 왔던 주지번(朱 之 蕃)의 서문이 있고, 강세황(姜 世 晃)이 소장했다고 전하므로 『고씨역대명공화보』보다 조금 늦게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당시화보』 권5의 「죽수계정(竹 樹 谿 亭)」의 구도는 윤두서, 강세황, 심사정, 이인상의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역대 화법을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도록 한다는 목적으로 편찬된 『개자원화전』은 18세기 이후 우리나라의 산수, 인물, 화조, 영모 등 모든 분야에 걸쳐 그 영향이 직·간접적으로 나타났다. 『개자원화전』에 제시된 점경인물(點 景 人 物 : 산수화에 나타나는 작은 인물)의 자세와 수지법(樹 枝 法)·준법 등이 조선 후기 남종문인화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이 책에 수록된 명가(名 家)들의 구도를 약간 변화시켜 모방한 그림들도 많이 그려졌다. 예를 들어 강세황의 「벽오청서도(碧 梧 淸 暑 圖)」는 화제에 명시되어 있는 것과 같이 『개자원화전』에 수록된 명대의 오파 화가 심주의 같은 제목의 그림을 모방한 것이다. 『개자원화전』이 편찬된 시기는 이미 남종화가 중국 회화의 정통이라는 인식이 확고하게 자리 잡은 이후였다. 따라서 이 책에 포함된 화법을 창시한 화가들 중에는 남종화파에 속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우리나라에서 남종화가 크게 유행한 당시에는 그것을 하나의 화파라는 개념보다는 양식적인 개념에서 이해한 면이 강하였다. 그러므로 도화서(圖 畵 署)의 화원들이나 사대부 여기화가(餘 技 畵 家)들이 모두 남종화의 양식을 답습하는 현상을 보였다. 김홍도(金 弘 道), 이인문(李 寅 文), 김응환(金 應 煥), 김석신(金 碩 臣) 등 많은 화원들의 산수화에서 남종화의 준법이나 구도를 빈번히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이 하나의 시대 양식이 될 정도로 널리 성행하였다. 19세기에는 18세기에 형성된 조선 남종화의 기초 위에서 추사(秋 史) 김정희(金 正 喜)와 그 주변 인물들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남종화의 세계가 전개되었다. 이 시기에도 물론 문인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지만, 새로운 문화계층으로 성장한 중인(中 人) 화가들도 남종화의 성장에 큰 몫을 하였다. 대표적인 문인화가로는 정수영(鄭 遂 榮), 이방운(李 昉 運), 신위(申 緯), 윤제홍(尹 濟 弘), 그리고 김정희 일파에 속하는 조희룡(趙 熙 龍), 전기(田 琦), 허련(許 鍊) 등을 들 수 있다. 18세기 산수화에서 중국의 여러 남종화가들의 양식을 답습하였다면, 19세기에는 주로 황공망과 예찬, 그리고 ‘미가 산수’로 그 범위가 좁아졌다. 그리고 많은 그림들이 서예성을 강조한 소략한 스케치풍을 보인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김정희의 「세한도(歲 寒 圖)」일 것이다. 이 현상은 중국 청대 후기 문인화에서도 볼 수 있어 보다 밀접해진 한·중 화단의 관계를 보여준다. 또 한편으로는 화가들의 개성이 더욱 뚜렷이 표현되는 경향을 보였다. 그리고 방작(倣 作)의 모델이 중국 회화가 아닌 조선 남종화가의 작품으로 발전하는 양상도 보였다. 이 사실은 조선의 화가를 역사적으로 추앙받아 온 중국 화가와 대등한 위치에 놓게 되었다는 획기적인 변화이므로 그 의의가 크다. 그러한 사례로 허련의 「방완당산수도(倣 阮 堂 山 水 圖)」를 들 수 있다. 추사 이후 조선의 남종화는 더 이상의 발전을 하지 못하였다. 단지 조선 말기 화원들에 의해 선택될 수 있는 하나의 양식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남종화 본연의 취지나 정신에서 멀어지는 경향을 보였다. 이 시대에는 오히려 묵란(墨 蘭)과 묵죽에 뛰어났던 흥선대원군 이하응(李 昰 應), 민영익(閔 泳 翊), 김규진(金 圭 鎭) 등의 업적이 두드러진다.

[네이버 지식백과]남종화 [南宗畵]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